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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대해 아주 가끔씩 썰을 다루었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동족을 노비로 삼는 극심한 피라미드 사회였던 것이다. 

[C.S-757] 세종 대왕은 조선의 태평성대 역사를 연 성군인가? 조선을 망하게 한 폭탄인가? 치세만큼 백년지망계(百年之亡計)의 핵폭탄이 된 종모법과 부민고소금지법의 폐단!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그토록 많은 밥을 먹었는가? 그럴만했다고 보는 생각해볼 이유들


흔히 드라마 사극에서 조선시대 양반은 물론, 머슴마저 풍류를 즐기는 것처럼 멋있게 나오지만.. 

실상은 쉴드가 쳐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구시대의 왕조는 No 답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역사조작이라고 하겠지만, 문득 서양인들이 둘러보았던 조선의 평가가 한결같다는 것은 교과서에서 그나마 가졌던 장미빛 판타지에서 깨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1890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을 경악시킨 조선사회의 노비제도 
조회수 7,325회•2020. 11. 2. 

당시 서양인은 조선의 사회를 기술하길, 길을 혼자 다니는 여자는 처음 만난 남자가 마음대로 할수 있으며 관아에 도움이나 보호를 요청할수 없다는 말을 한다. 

사실상 서민 여성은 인권이란게 없었다는 것이다! 


한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란 말처럼, 그나마 남자하인 밑에서 태어난 사내는 혼인기가 되면 자유가 되나, 

여자 아이는 계속 엄마처럼 노비로 주인집에 머물거나, 또 다른 곳에 팔려가 노비나 기생이 되는 신세!



요즘 현대사회속 여성의 기준으로 보자면, 지옥도 같은 나라였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 서양인도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속에서 종종 노예들을 삼고 그랬겠지만, 그런 그들도 당시 조선에 와, 타종족이나 민족이 아닌, 자국민끼리 서로 노예를 삼는 조선풍습을 보고, 진상이라고 느꼈던 뉘앙스가 보인다. 

 


  1894년 여름,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 이야기 
조회수 1,523,729회•2019. 9. 15. 


하도 수탈이 심해서, 남자들이 열심히 일해봤자 자기 재산을 유지할수 없고 더 빼앗길 뿐이므로, 남자들 대부분이 일을 하지 않는 일이 잦았고, 한국 하면 빨리빨리 문화가 생각나나 조선시대만 해도 지극히 일에 있어서 게을렀다는 내용을 전달한다. 

민비때는 하도 수탈이 심해서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부분!




아래 영상은 우리가 국사책에서 중요한 전쟁처럼 짚고 넘어가던 


병인양요에 대한 프랑스병사의 후술이다!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병사가 바라본 정은 많지만 미개한 조선,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조회수 70,621회•2020. 10. 20. 

간단하게 말하면 쥐베르라는 프랑스 군사의 입장에서 이 추억은 전쟁이 아니라, 그냥 소풍이고 산책이었다. 
함대 7척 뜨자,,, 뭘 제대로 싸운것도 없이 한양 나랏님과 관리들은 꽁무니게 나게 백성들을 내팽개치는 삼십육계 진법을 써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훗날 이들 군함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 떠나게 되자,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배가 되었고, 외세개입에 대해서는 더욱 쇄국적이 되었다. 

이 사람은 양심적이게도, 자신들의 처음보는 문명나라의 침입이 무력인것이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옳지 않음을 기술하였다. 



  조선말 지식인들이 바라본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 장애를 가진 아들 순종을 위해 국고를 탕진한 그녀 
조회수 67,137회•2020. 11. 11. 

조선말 벼슬에는 중용되지 못했던 황현의 기록으로, 

흥선대원군때 많은 백성들이 규율이 빡세서 두려워했으나, 민비가 집권하고 10년 쌓아둔 나라재산을 1년만에 탕진하고, 외척이 드세지고 수탈이 더욱 심해져,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그리워했다는 내용이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한때 드라마의 여왕이던 이미연의 명성황후 이미지 때문에,

현대인이 생각하는 민비에 대한 이미지는 참으로 좋고, 향수가 있다...


허나 실제로는 투기도 심했고, 잔학했던듯 한다!


영상의 내용중 일부는 블로그에 나오는데..

명성황후가 귀인 장씨가 아들을 낳자, 이에 분노하여 장씨의 음부 양쪽 살을 도려내어 상처로 고생하다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 아들이 바로 의화군 이강이었으니, 훗날에는 의친왕으로 봉해지는 인물이었다. 

훗날 서양식 관복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면.. 그나마 요즘 사극에 나오는 왕족처럼 인물이 좋은 편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스웨덴기자의 눈에 비친 미개했던 조선, 그리고 그가 만난 고종과 순종의 모습 
조회수 490,603회•2020. 10. 22. 
https://www.youtube.com/watch?v=fqF6-GAfHKU



고종황제는 상냥한 목욕탕 아줌마 같은 느낌이었고, 흔히 생각하는 황제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순종 황제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으며, 노란 두눈을 쉴새없이 깜박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돌려대었다.



그 서양인의 눈에는 순종의 모습이 별로였던듯하다. 

어쩌면 20대 때 겪은 독살비슷한 경험때문인지, 원래 삼국지 유비의 아들 아두처럼 어릴적부터 그랬던건지는 모르지만, (사실 아두도 조자룡이 애써 구해오자 유비가 소중한 신하를 잃을 뻔했다며 말에서 집어던져 그 후로 상태가 안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위키-대한제국 순종

생애[편집]

왕세자, 왕태자, 황태자 시절[편집]


익선관 황룡포 순종 어진

고종 광무제(左)와
황태자 시기 순종 이척(右)

대훈위 국화장경식을 단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


1875년
 3월 8일, 2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882년 민태호의 딸과 혼인하였다. 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격상되었고 같은 해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어머니 명성황후를 잃었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순종은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 명성황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을 포함하여 4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조졸하고 성인이 된 자녀는 순종이 유일하다.

1898년 8월 2일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커피의 향이 이상함을 알고는 곧바로 그 커피를 땅에 부었으나, 순종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해서 이가 다빠져 틀니를 끼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범인인 김홍륙은 같은 해 10월 10일에 고종에 의해 교수 처리되었다.


이것은 추후 순종이 고종의 강제퇴위 압력후..

 양위를 받고도 3년내내 상소에 대해 어떤 이의를 제기할만한 지적능력이 없어진 사건으로 전해진다. 판단능력을 잃은 지적장애인 불구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후사도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 독차의 영향이 생식능력까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화군이 만약 고종의 적자였다면 역사는 좀더 좋았졌다거나, 적어도 마지막 물줄기를 바꿀 가능성은 있었을지 모른다. 혹은 한일합방에 완벽히 왕조가 사라지지 않고, 식민지배동안에도 일부의 군주적 권한을 행사할수 있는채 이어졌다면.. 광복이후 새로운 조선의 체제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뭐..근거는 딱히 없는 가능성의 이야기지만..! 세계의 큰 열강들 6개국을 돌아다닌 의친왕의 입장에선 조선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 자기가 살아온 나라의 구체재가 얼마나 낙후된 것인지 깨닫지 않고 싶어도 깨달을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남모르게 개혁의 의지만큼은 컸을지도 모르니,


조선왕조 오백년사의 병폐가 유전된 것은 위로부터 개혁의지가 없었고 기득권 누리기에 골몰했으니, 사실 이것만으로도 큰 전환의 요소가 됐을지 모른다. 




*[역사 속의 인물] 유일하게 독립운동 나선 왕족 이강

순종에 비해선 날렵한 인상으로..

인물도 좋은 편이었지만, 1895년엔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등 서양 6개국을 차례로 방문하는 특사활동을 하며, 우물안 세상을 벗어날 해외경험도 쌓을 기회가 있었고..

왕족중에서는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사로 기개도 좋았고, 

일제때 박해를 받았으나, 광복후엔 이승만 정부의 견제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조선말 사회제도는 수백년전에 머무는 구태로 당시 폐단이 극심했고, 궁궐안에 머물지 않고 넓은 견식을 쌓을 세상물정은 매우 큰 자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순종이 자식이 없던 탓에.. 한때는 대리청정을 할 정도였지만, 한일합방 3년전 순종이 황위계승자로 가장 어린 영친왕을 결정하게 되지만, 3년뒤 한일합방으로 


순종의 황위계승자 책봉 배경 관련 논란[편집]

순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이복 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이복 동생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영친왕 황태자로 책봉하였다.[2]

1907년 8월 23일을 기하여 의친왕 대리청정에서 물러났고, 이미 6일 전인 1907년 8월 17일,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위계승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3][4]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5]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6]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6]




바로 그 의친왕의 아들이 현재 81세를 맞이한 약간 성룡 닮은 인상의

 마지막 황손 이석인 것이다!


한국도 한 10년전만 해도 국회의원 아들만 해도 군대안가려고 뺑끼쓰고, 그런 구태속에서.. 

정상적으로 군대도 갔고, 월남파병까지 갔다왔다. 



그리고 가수로써 활동했다.

이석~비둘기 집 (68) 2009 가요무대 
조회수 8,216회•2019. 10. 28.

설운도나 송대관, 태진아만큼 막 날리지는 않았다!

  마지막 황손 가수 이석 / 이것이 인생이다 [추억의 영상] 고종의 손자이면서 '비둘기집'가수인 이석의 파란만장 인생이야기 KBS (2003.4.1) 방송 
조회수 588,200회•2020. 12. 27.

조선은 과연 좋은 나라였을까? 


가타부타 말이 있겠지만,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그 시절로 돌아갈수 있다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자청해서 갈까?


만약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평가의 한 측면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집안들이 가라족보를 가지고 있고, 노비집안이었는데 양반족보로 바뀌는등 일들이 많았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도 헬조선하면 빈부격차를 논하고 재벌과 서민의 타고난 빈익빈부익부를 논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서민이나 노비로 태어나면 문맹은 기본이고, 평생 도끼질이나 농사나하면서 허드레집 방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고기도 제대로 먹을 기회가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양반수저로 태어나면 평생을 복지국가처럼 펑펑 놀며 살수 있지만, 재수없게 절대 다수인 서민이나 노비수저로 태어나면.. 사회주의 국가마냥 평생을 이런저런 관리들에게 삥뜯기며 수탈을 당하면서 희망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서민이 성공한 사업가가 되기가 어렵다지만,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라도 일단 있지만, 

예전에는 노비로 태어나면.. 평생을 머슴처럼 살고, 집주인의 집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중죄를 진 수배대상이었으니, 성공의 성자도 꿈을 꿀수가 없던 세상이었던 것이다. 



현대인에게 옛날이란 것은 낭만과 판타지의 한 요소일지 모르나, 옛날 사람에게 그 옛날은 생존과 희망회로조차 돌릴수 없는, 그냥 태어났으니 한 생을 힘겹게 살다 마친다! 이런 세계관이었을것이다. 



 


글을 마친다. [2021.2m.17, 오전 12시 56분경,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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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arlie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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