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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교파에서 전도등을 할때, "저는 혼자 성경책을 공부했습니다"와 같은 말을 하고, 사실상 주입받은 교리들을 전파하고 끌어들이는 전략이나 수법등이 오늘날 많이 예시되어 있으나, 


진실로 성경책을 태어나 혼자 보고, 혼자 납득한 이는 필자이다. 


어릴적 필자는 집안에서 부모가 무교=>불교=>기독교=>천주교로 종교를 갈아타며, 열심히 각종교를 갈아타는 자유로운 기풍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엔 부처님이 진리란 말을 듣다, 중학교땐 안수기도 목사가 이래저래 오가는 풍경을 보며, 고등학교때는 집안에 교황 사진이 걸리는 풍경을 보면서 자랐다. 


그렇기에 필자는 종교에서 틀과 예식에 대해서 약간의 덧없음이랄까? 


오늘 자신이 믿은 것들이 내일은 자신을 배반하며, 틀린 것이라 말하는 때가 올것이며, 내일 모레는 또 뒤집어질수 있으리라, 

스스로도 그렇게 확신없는 것들을 강력하게 주장하나, 미래에 또 바뀔 것이라면.. 

언제나 그러한 확신에 휘말리는 자녀들은 무슨 덧없음이란 말인가!



오히려 크게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나왔다.  



어린시절 필자의 뜻과 무관하게 지나왔던 것은 바로 종교와 가족이었다. 

종교에 있어서 그리하였고, 

어머니에 있어서 그리하였다. 


필자의 10대시절까지 3대 종교가 스쳐지나갔고, 

필자의 10대 시절까지 엄마라 불러야 하는 이들이 5명을 스쳐지나갔다. 

나 스스로가 그것을 원하든, 원치않던....

때론 마음에 든다고 그것을 붙잡을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때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내가 버릴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문제들은 어린 필자가 주권을 행사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대다수가 경험치 못할 환난과 고난을 보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선택과 주권과 상관없이, 겪었어야 할 부당한 문제들에 있다면? 쓸데없이 억울하게 불필요하게 스친 그림자들에 의해 스스로나 남탓을 하면서 어울려줄 의리또한 없다는 것이다. 


인생 출발포인트 스테이터스상태에서

타고난 사랑이 남들보다 부족했다 한들, 거기에 대해서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고, 

쓸데없이 몰아붙여지는 절망과 실의가 운명처럼 강요된다면? 흔한 드라마처럼 그것들을 내가 마침 그곳에 존재했으니 운명의 희생양이니 어쩔수없다라는 식으로 따르지 않기로 하고, 외부적 강요들이 따른다면 그 또한 "너에게로 반사"로 치며, 내가 가지지못한 스테이터스보단, 내가 가진 스테이터스에서 나름 뽑아낼 것을 뽑아내고 발전시켜가면서 사는쪽을 선택한 것이다. 


환난의 일들을 감정을 따른다며 산다면 그것은 그저 인생을 원망하며 술만을 퍼마시는 마이너스가 되겠지만, 

거기에서도 배울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산다면, 그것은 남들보다 더 넓고 폭넓게 볼수 있는 통찰력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는 플러스 스테이지로 살릴, 특전 행사로 되돌릴수가 있는 것이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뽑아낼것은 뽑아내자! 

때때로 필자는 한 상황에 깊이 몰입하는 배우가 되기보단, 그 상황과 배우로써 임하는 필자 자신마저도 하나의 객체로써 바라보며, 그 자체마저도 다시 무감정하게 돌아가 냉정하게 분별하는 하나의 감독적 시선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었으며, 필자 특유의 영적 계산서에 따른 실리주의적 사고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고가 음모론에 있어서 남들과 다른 매우 객관적 관점의 편중없이 바라보는 연구에선 무척 장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말이 있지 않은가?


뜻대로 태어나지 않고, 뜻대로 살아가지 않고, 뜻대로 죽을 수 없는 인생...


하가다서에 멋진 말이 있다.



[C.S-762] 하가다서(haggadah,외경)+코란+에녹서 다른버전- 루시퍼(Lucifer) 반란의 계기가 된 인간의 탄생! 사탄은 왜 인류를 타락시켜 지옥으로 이끌고자 하는가?

http://charlieman.tistory.com/172


사람이 천사에게 언제는 이 세상으로 억지로 내보내더니

이제 와서는 다시 이 세상에서 데려가느냐고 불평을 하면,


너는 네 뜻과 다르게 창조되었고 

네 뜻과 다르게 태어나고,

네 뜻과 다르게 죽을 것이라고 일러주지 않았냐고 반박한다.

그리고 네 뜻과 다르게 그분 앞에서 평가받게 된다고 일러준다.






필자의 성격이 장성하여 약간 세상을 비껴나가며, 많은 것들에 애착하지 않는 기풍을 가진 것은 그러한 생활환경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르고, 음모론을 하면서도 쓸데없이 프레임을 지나치게 나누어, 

종교적 차별을 두어 방문자를 두지 않는 것도 그러한 연유일지 모른다. 


아침엔 불교를 스치고, 점심엔 기독교를 스치고, 저녁엔 천주교를 스치고, 

근데 사람은 그들이 어느 종교에 있어서, 혹은 교파에 속해서 참되고 올바른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어느 종교이든, 거기엔 선인과 악인이 항시 비등비등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오늘날 아와 어다름의 차이를 가지고, 교파간에 수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이쪽에 있기에 절대적 구원이며, 이들은 이런 쪽에 있기에 절대적 패착을 가진다며 따지며, 피튀기게 싸우는 것을 보면 덧없다고 느끼는 감이 사실상 크다. 

그들은 교리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열중하는 십분의 일이라도, 정작 자신이 실생활에서 정말 선인이 되고자 하는 삶을 열망하여 걸어가고 있는가? 타협하여 악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데에는 정작 무관심하기 때문이며, 교리 논쟁보다는 그 선인과 악인의 행적이 실질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데 큰 판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말하는 이런 것들은 누군가에게 생소해보일지 모르나, 많은 유대인들이 제식과 예식과 권위로써 다투었으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 왈~ 제자들에게 수도없이 헛된 사변적 논쟁을 일축하고, 그러한 일에 심령을 집중함보단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삶의 길을 가는것에 그 심령을 집중하고 실천하라 하였으나, 그또한 그런 기조와 주위환기가 수도없이 나타나는 성경을 묵묵히 보면서 얻은 결론중에 하나일 뿐이다.



필자가 보건데... 물론 교리적 정체성에 따라서 보다 정통적이고 사이비적인 기류들이 나뉠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것이 본인들이 천국가는데 절대적 요인이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할수 밖에 없다. 


세상이 말하는 매우 강성한 정통교단속에 속해있어도, 불법과 악행을 저지르는 종교인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천국에 가지 아니하고, 지옥에 갈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매우 사이비와 잘못된 목자가 이끄는 이단교단에 있어서도, 교리에 무지하나 정말로 선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종교인은, 그들의 목자가 설령 지옥에 가더라도 신자 개개인의 근기에 따라서 천국에 갈 이가 있는 것이다. 


어느정도의 분별은 필요할지 몰라도, 결국 심판은 그 순간 그 상황에 있는 개개인의 깊은 동기와 연유를 고려하는 만인이 피할수 없는 개개인의 심판이지.. 

나는 이곳에 속해 그 모두가 천국간다가 아니며, 당신들은 이곳에 속해 그 모두가 지옥간다고 결정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뜻대로 태어나지 않고, 뜻대로 죽지 못하는 이가, 원천적으로 다른 뜻대로 태어나지 않고, 뜻대로 죽지 못하는 동등한 피조물의 권리를 가진 다른 이를 정죄하거나, 선포할 자격은 애초 없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러니하게 음모론을 할때는 세상을 꿰뚫어보는 총체적 통찰을 하는데에 도움이 된 것이다. 세상속에 너무 깊이 빠지고 열중하는 자는 스스로 배역에 깊게 삼켜지기 때문에, 세상자체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가 힘들다. 

너무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을 달려온 이들도, 너무 불행하고 어둠에 삼켜진 길을 달려온 이들도.. 하나는 지나친 희망에, 하나는 지나친 절망에 깊이 삼켜져 편중없이 세상을 보기 힘들다. 




필자에겐 실로 교파가 없다. 성경책 완독을 군대에서 처음했기 때문이다.  군생활 첫해에 911 사건이 발생했고, 훈련 마지막주차에 그 소식을 들었다. 세상은 예전과 더 이상 같지 않았지만, 그 당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시절로부터 한참뒤 2015년에 필자가 911 사건의 조작을 지나,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연구하고 세계의 종말을 경고하는 이가 되어 있을줄은 당시로서는 꿈에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2014년에도 말이다!)



자유롭게 불경, 성경책등을 얻었지만, 주로 불교사찰에 갔다. 

그 갇힌 군대에서 교회에 가면, 군인들이 가장 질려하는 하필 초코파이 2개와 맛스타를 주고, 사단내 교회에 들려 (물론, 여자도 없고..) 1~2시간이면 지긋지긋한 내무반에 들어와야 하지만, 

불교를 가면, 육공트럭을 가고 시원한 바깥 시내바람을 맞으며, 산자락 절을 올라고, 젊은 예쁜 여자 민간인들도 볼수 있고, 맛있는 산채비빔밥과 간식도 풍성하게 넘쳐났고, 반나절을 보내면서 지긋지긋한 사단으로 늦게 복귀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당시 많은 기독교 장병들도, 실로 불교사찰에 많이 갔던걸로 기억한다!

20대의 군인들에게 산채비빔밥과 외출, 그리고 민간인 여자들을 흘끗흘끗 볼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천국이고, 그 천국을 구태여 발로 뻥 걷어차는 이는 적은 것이다. 



지금 보면 눈으로보기에도 피곤한 포켓사이즈의 군배포용 기드온 서적으로 신약을 통독했다. 

그러나 환경은 어찌보면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오늘날 처럼 스마트폰을 손에 달고 살고, 유튜브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군인은 TV를 자유롭게 볼수 없었으며, 

유일하게 그당시 사단에서 별의 지시로, 구타근절 운동과 화목한 병영생활을 위해 권장했던 저녁 TV 시청이 장나라와 양동근의 뉴논스톱이었다. 60여명 가까운 중대 인원이 휴게실에 모여, 병장은 폭소를 하고, 상병은 미소를 짓고, 일이병은 웃음을 참기위해 부동의 자세로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자는 군대에 있었기에 장나라가 그렇게 인기다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떡상은 치는줄은 몰랐다!)



그저 외부와 차단되어 저녁무렵, 1~2시간의 자율시간에 책이 많은 것도 아니며, 보는 것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시 불경과 성경을 읽어나갔다. 

 


혹자는 필자에게 이단이 아니요? 신천지요? 혹은 어느 교파요?? 말을 하는데.. 

실로 필자는 성경을 보면서 공부를 혼자했고, 어떤 단체를 거친 적이 없기에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수많은 교파마다 필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필자의 해석이 자신들과 다른부분도 있을 것이다. 다른 부분이 있을때는 흔히 말하면 이단론을 부치는 것이나... 



필자는 성경을 홀로 읽었고, 혼자 저렇게 밑줄을 치고, 혼자 스스로 성경을 가장 깊게 볼수 있는 심신이 안정되고 육체와 정신이 강건한 군인시절에, 스스로의 내적 중심에 기반하여.. 혼자 스스로 구절들을 판단하고, 혼자 스스로 주석들을 달고, 혼자 스스로 납득을 하였으며, 혼자 스스로 납득한 것들에 대해서 어떤 의문을 가지거나, 남들에게 물어봐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찾아와, 이것은 행위 구원론이 아니요, 교리 구원론이라 한들.... 

나는 그런 후세에 분파되고 형성된 신학들에 궁금해하지 않으며, 사전에 공부한적이 딱히 없으며... 

필자가 홀로 내적 중심에서 올바름을 가지며, 성경을 보며... 이 페이지에선 이것이 본질이고 핵심이다라는 주석들을 따를 뿐이며, 관심이 없다. 20여년전의 내가 밑줄을 그은 것은, 야고보서는 엄청나게 행함의 본질을 다루고 있고, 그것을 요약하여 주석을 다를 뿐이다. 


필자의 양심에 기반한 주석들이 행함을 중요하게 밑줄긋고 결론내렸다면...? 그것이 필자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샌가 생겨난 행위구원론의 교리와 비슷하던 아니던, 내가 그러한 교리를 만든 박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주의이고, 뭐에 걸린다하여.. 사실상 1도도 신경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신챙의나, 이신쟁의냐, 삼위일체가 어떠한가? 많은 프레임을 주는 주제들에 대해 사실 관심도 없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러한 논쟁들로 수없이 이단과 정통을 가르고 싸우고 있으나, 

필자가 느끼기엔 그런 논쟁이 성경에서 핵심은 아니며, 모르거나 불분명한 것은 불분명한 그대로 남겨두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토록 수많은 논쟁이 종식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성경이 이런 교리논쟁에 있어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 보단, 수많은 사람들의 바램에 의한대로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식으로 해석될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로 성경을 혼자 보는 사람은, 조직체로써 연대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논쟁에 가담할 필요도 사실상 없으며, 그냥 교파가 말그대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에게는 교파가 없다. 이 세상 존재하는 어떤 교파나 만들어지고 가공된 훗날의 교리들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 성경을 공부하고 이해해왔기 때문에, 어찌보면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성경을 말하는 사람이다. 

비유하자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무인도에 착륙한 로빈슨 크루소가 홀로 표류하며, 마침 성경책이 있어 아무도 의지하지 않고, 어떤 수많은 전과들, 교리와 주석서없이..성경책하나 보면서 성경연구를 해나가고 홀로 자신만의 고유한 성경해석을 지니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성경을 읽는 환경도 거의 그와 같았던 것이다.



기독교인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고 한다. 

실로 성경책에는 기독교란 말자체도 없으며, 사실 권사나 목사도 없으며... 

오늘날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태그에 있어서는 성경외에 너무나 불필요하게 가져야 하는 교리적 선택과, 파벌...그리고 성경에 있지 않은 수많은 액세서리적인 양식을 지니고, 자신들과 같아야 기독교인이라 하는데... 거기엔 어떤 조직체 단위로 부여된  매우 강요된 틀이 있기 때문인데, 

필자는 성경을 홀로 보면서 느낀점에서 벗어난 그러한 외부에서 강요된 틀을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길드에 가입해야 회원뱃지가 주어지는데, 거기엔 수많은 길드의 강령이 따라붙는데.. 

엄밀히 말한다면 오늘날의 성경종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공인함으로 시작되었고

그 중에서 꽤 강성하고 규모가 큰 성경을 연구하는 스터디 모임들이 종파를 세우고 시대에 따라서

 발전해나갔으며.. 그들이 성경연구에서 전문적 질량들이 쌓여감에 따라서 권위와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으나, 

성경자체가 오늘날 기독교의 정통성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서 성경을 읽어나간다면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성경의 정수는 사람이 종교인, 비종교인이 되는 것에 대한 안내가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감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천국과 지옥중에 천국에 맞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느정도 나침반을 제공한다는 것에 있다. 

엄밀히 말한다면 오늘날 시대가 가진 종교적 프레임은, 그보단 현실적 영향력과 파급력들이 갖다붙인 프레임 나누기에 가깝다..





필자가 실로 성경책을 혼자 보건데, 기독교란 것은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후세에 성경책을 정의하는 하나의 종교집단이 거대화에 나타난 하나의 조직화된 해석기류를 가진 양식일뿐, 성경책 자체가 그것을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성경책을 보면서, 왜 그것이 하필 오늘날 21세기에 존재하는 종교적 카테고리와 양식을 따라야하는가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에 가서 헌금을 한다는 교리조차 성경에는 없는 부가적으로 역사적 발전속에서 나타난 양식들이다. 

또한 오늘날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기도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성경책을 보면서, 오늘날 종교의 틀을 확실히 가르는 것처럼, 왜 한종파에 소속되면 다른 것들은 물가에도 얼씬하지 않으려는 것같이,  이슬람서적을 찾아보거나, 불경을 찾아보면서 인간의 옳고 그름에 대해 찾아보는 연구를 나쁘다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필자가 성경책을 보면서 느낀것은.. 얼마든지 필요하다면 찾아볼테면 찾아보라는 것이다. 딱히 그것에 대해서 제약을 두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이고 범용적이지는 않겠지만, 사람의 인생사와 환경은 모두 다르니,...

다양하게 찾아봄으로써 오히려 본질이 무엇인가 찾아갈수 있는 길도 존재하는 것이다. 



뭐라하든..뭐라하지? 그냥 필자는 성경을 원시적으로 보고, 그것을 종교화하는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당신은 어느 교파이고, 어느 교리를 따르고, 거기엔 구원이 없고, 여기엔 구원이 있는데.. 이런 새로운 틀들을 가지며 살아가나, 


실로 필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교파를 소속하고 특정하고자 한다면, 

그저 1인 교파요, 내가 군시절에 심각하게 통독하고 해석한, 내가 옳다고 여겨지는 주석들을 그 어떤 외부의 해설서나 말보다, 주춧돌로 삼는 교파라고 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 필자의 해석에 따라서 이런 영상들을 내놓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CREEP 2019 MV [CRAMV II-7]

조회수 1,811회•2019. 9. 22.

어떤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필자만의 고유한 해석으로 성경에 대해 가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이 이들이 필자와 같이 홀로 성경책을 보고 이해하는 것을 그닥 내키지 않아하는 것은, 어찌보면 수많은 연유가 있다. 

모든 이들이 필자처럼 성경을 본다면, 오늘날 높은 종교건물들은 설 자리가 없다.  

필자는 성경책을 홀로 보는데, 어떠한 성직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특수하고, 일반적이지 않고, 많은 이들이 필자와 같은 삶의 궤적을 지나며, 그순간 같은자리에서 성경책을 접할 운명적 사유들은 없기에.. 추천되지도 않으며 달리 교회제도와 교회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그런 환경속에서 그렇게 성경책을 접했기에, 그런 양식을 지니게 되었고, 범사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이들이 필자처럼 혼자주의로 간다면, 오히려 혼란이 클지도 모르다...



양은 양떼를 지어, 늑대처럼 홀로 떠돌지 않고, 양의 도리로써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며, 

애초 홀로 광야를 누빈 늑대는, 늑대의 도리로써 살아가며, 억지로 양떼를 합류하며 부자연스럽게 살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렇게 태어났고, 거기에서 자라났고, 그럼으로써 그쪽에 합류한 것이기에 당신의 그 삶은 옳을수 있다.

필자는 이렇게 태어났고, 이러하게 자라났고, 그럼으로써 이쪽에 다다른 것이기에... 역시 필자의 그 삶은 옳을수 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삶을 산 타인에 대해, 특히 영적 견식에 대해 그 다름에 대해 깔아뭉개거나, 폭력적 시선을 두나, 그들이 하나 간과하는 것은, 자신의 자신의 환경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얻은 것을 당연시하듯이, 남들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자연적으로 얻어진 그런 좌표가, 또한 남들에게는 다를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때때로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기도 하는 존재이니..

최종적으로 그 옳고 그름의 우열에 대해서 평가할수 있는 것은 다투는 사람들이 아니며, 

오직 신만이 평가할수 있는 것이 합리적이고 공정한 일이니, 사실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수많은 당신들이 여러분으로써 존재하고, 그 사람들의 신념과 해석이 필자와 다른들.. 저마다 거기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달리 할말이 없는 것이고, 

저마다 그 다름에 대해서 딱히 비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단지, 필자가 20대초반무렵 혼자 읽고, 혼자 납득했던 성경책을 보면서, 물론 수많은 사람들도 필자와 비슷하게 성경책을 읽고 비슷하게 읽겠지 싶었으나, 하필이면 30대 중반이 지나 말세음모론을 하면서 수많은 각계각파 교인들이 찾아와 뚜껑을 까보니, 너무나 이질적이고 색다른 말들을 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필자만큼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각파의 교인들과 대화해본 사람이 없었을 정도이다. 


세상은 성경책에 달리 한순간외에 나오지 않고, 강조하지도 않은 방언열풍에 휩싸여있고, 

성령이여 오소서! 등... 락밴드와 현대음악이 어우러지니 색다른 열풍들에 빠져있었다. 

마태복음과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많이 강조되지 않은, 기도함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이색적인 교파등이 넘치고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수많은 교리를 들어보기도 했으나, 그 어느것도 필자가 20대에 밑줄을 치고 스스로 단 주석보다 낳고 간결하지 못했고, 이끌림도 별로 없고, 중요한 핵심은 생략되고, 엉뚱한 것엔 사활을 걸듯 강조하는 것을 보고, 이것들 모두는 나와는 맞지 않는구나, 그냥 모두 스쳐지나 보냈다. 



그들에겐 단체와 조직이 있는 종교이지만, 필자에게는 성경은 그냥 내 삶에 있어서 숙고할 좀 더 반영될 부분이겠군! 스런 영양가 있는 삶을 이끄는 교훈집 같은 것이었다. 

크게 기대지 않고, 크게 의존하지 않지만, 크게 의존하지 않고 크게 투자한게 없기에, 크게 그르침도 없으며  크게 어떤 교리를 구태여 선택하여, 오늘날같이 파벌을 이루는 포지션 가르기에 참여하여 배팅해야 할 필요성도 못느낀다. 




필자가 되도록이면 음모론을 하면서, 프레임을 나누지 않고, 작은 허물들의 다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대승적으로 이끌고 가려는 기류는... 

모두가 그런 인생의 다름과 불합리함을 지니면서, 저마다 자신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그 다름에 대해 비판하고, 따지는 것에 집중한다면 유익함보단 무익함이 많고, 서로가 서로를 화평케 하는데 분열을 낳고, 본질에서 돌아간 것들에 또 깊이 빠지게 되어, 말세의 큰 재난앞에서 지혜를 모아 합치는 연대보다는, 서로 갈라져 사분오열만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작은 옳음들은 세상의 큰일들을 능히 홀로 감당하기엔? 그러나 역시 역부족일 것이다. 





글을 마친다. [2020.7m.23d, 자정지나 12시 35분경,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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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arlie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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